용에대하여
우리 문헌에 나오는 용의 기록은 그 역사가 꽤나 깊다.
용의 순수한 우리 이름은 미르(훈몽자회) 또는 미리(아언각비)다.
현재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용은 그 출생지가 약간씩 다르다.
인도에서 온 불교적인 용, 중국의 도교나 유교에서 온 용,
본래 이 땅에 있던 순수 토종 용 등이다.
그 역할을 뭉뚱그려보면 예시예언자·수신(水神)·호국·호법(護法)등
크게 네 가지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탈해왕은 용의 자식으로 인간세상에 내려온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또 견휜의 설화에서처럼 나라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도 용의 예언예시자적 역할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고려사》에는 서해 용왕이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에게 먼 훗날 아들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나와 있다.
고대소설 '홍길동'에도 아버지 홍 판서의 꿈에 청룡이 나타나서 홍길동의 탄생을 점지해주고 있다.
수신으로서의 용은 자연현상을 마음대로 조화부리는 존재로 신격화되었다.
진평왕 때는 용 그림을 그려놓고 비를 기다리는 화룡제를 지냈으며,
고려 헌종은 흙으로 용의 형상을 만들어 토룡제를 지냈다.
또, 조선시대에는 오해와 오강을 정하여 용신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성호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용이 싸우면 비가 내리고,
독룡이 놀라면 벼락치고, 용이 화가 나면 홍수난다'라는 부분이 있다.
토속신앙에서는 용왕에게 제사지내며 풍어를 기원하기도 했다.
민간설화에도 용왕·용궁이 많이 등장한다. 용은 호국의 상징이기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항복을 받아 국태민안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그 탑을 세운 후 머지않아 삼국이 통일되었다.
신라 원성왕 때는 당나라 사신이 동해용과 청지용·분황사 용을 고기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어가려던 것을 되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용은 불교를 보호하고 번창시키는 호법의 화신으로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불교의 유입과 함께 인도문물이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아직 신격화되지 않았던
중국의 용은 인도의 사신(蛇神)숭배 사상을 빌어 비로소 신격화되었다.
용은 신격화와 함께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승격되어 팔부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용을 임금에 비유한다.
고려가요인 <쌍화점>을 보면 우물가의 처녀가 용에게 손목을 잡힌 이야기가 나오는데,
즉 우물의 용이 바로 임금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용비어천가>에
태조 이성계를 포함한 웃대 선조들이 모두 용으로 표현되어 있다.
예컨대 용안(龍顔)· 곤룡포(崑龍袍)·용상(龍床)·용좌(龍座)·용가(龍駕)·용거(龍車)·용덕(龍德) 등의 단어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새해들어 첫 진일(辰日)을 '용의 날'이라 하는데,
이날은 하늘에 있는 용이 지상으로 내려와 우물 속에 알을 낳는다.
이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맨 먼저 물을 길러간 이는 그 표시로 우물에 지푸라기를 걸쳐놓는다.
집안 우물이든 공동우물이든 용날 하루 전에는 용이 알을 낳을 수 있도록 우물 주변을 청소하였다.
기우제나 기자의식 때에는 반드시 용의 강림을 받았다.
신라때는 삿된 것을 내쫓기 위해 대문간에다 용의 아들인 처용 그림을 그려 붙였다.
심지어 저승으로 가는 상여에도 용은 망자의 명복을 빌며 따라간다.
우리 속담에는 용에 관한 것이 유난히 많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은
변변찮은 집안에서 인물이 났다는 이야기이고,
'길 닦아놓으니 용천배기 지랄한다'는 말은 공들여 놓은 일이 보람없이 일그러졌을 때 하는 이야기다.
또한 '용 못된 이무기'는 심술만 남아 남의 일에 훼방놓는 심술꾸러기를 가르키는 이야기다.
'용이 물 밖에 나니 개미새끼까지 까불싹댄다'는 말은
잘난 사람이 한번 실패해서 기가 죽으니 하찮은 것들이 함부로 한다는 말이다.
놀라운 상상의 동물인 용은 십이지의 다섯 번째 동물로 '진(辰)'이라고 한다.
'진(辰)'이라는 글자는 용의 특징을 그대로 닮아 힘차게 기상하는 모양이다.
진은 시간으로는 오전 7시에서 9시 사이, 달로는 음력 3월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