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후리(先義後利)와 선리후의(先利後義)
세상을 살면서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가장 큰 고민은
명분과 이익사이의 갈등일 겁니다.
명분을 따르자니 이익이 없고, 이익을 추구하자니 명분이
달리고, 정말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으실 겁니다.
명분과 이익,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예로부터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텍스트로 유명한
<대학>에는 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物有本末 事有終始)
어떤 것을 먼저 할지 뒤에 할지 안다면 진정 도에
가까울 것이다.(知所先後則近道矣)’
사실 제가 대학을 처음 읽었을 때 이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머리로만 해석이 되었지 가슴으로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더군요.
사람은 왜 생각하고 경험한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전은 세상을 살아 본 사람들의 안목으로 봐야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이든 근본과 말단, 처음과 끝이 있다.
따라서 리더는 선후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사결정에 중요한 기준이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본말(本末)과 시종(始終),
그리고 선후(先後)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진행할 때 선후를 따집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말단인지, 어떤 것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지를
정확히 가릴 수 있다면 이치를 알고 순리를 아시는 분일 겁니다.
문제는 무엇이 선후고, 본말이고, 시종인지 판단하는 것인데요.
맹자와 순자는 선후를 의(義)와 리(利)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의(義)는 명분이고 이(利)는 이익입니다.
명분과 이익 이 두 가지 개념은 동양철학에서 보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서의 문제일 뿐입니다.
’명분만 추구하고 이익을 도외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먼저 추구할 것인가?’
에 대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전국시대 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명분을 추구하고 이익을 뒤로하면 영광을 얻을 것이다.先義而後利者榮
반대로 먼저 이익을 추고 명분을 나중에 한다면 반드시 욕을 먹을
것이다. 先利而後義者辱
선의후리(先義後利)와 선리후의(先利後義)
이 두 가지 상반된 순서의 결과는 어마어마합니다.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은 참담한 결과를 얻을 것이고 명분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은 영광을 얻을 것이란 순자의 이 이야기는 명분과 이익은 선후의 문제이며
선후와 본말을 정확히 알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간단한 이야기지만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오로지 돈만 벌겠다고, 높은 자리만 올라가겠다고
선후를 바꾸고 본말이 전도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 당장은 원하는 것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긴 인생의 항로에서 보면 결코 아름다운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명분 없는 영원한 이익은 없습니다.
근본이 안 되어 있는데 말단이 잘 될 일이 없습니다.
선후를 알고 본말을 알아서 차근차근 순서대로 일을 풀어 가신다면
결국 명분과 이익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
참으로 쉽지 않은 화두입니다.
박재희 / 민족문화컨텐츠연구원 원장
산
강물을 따라 걸을 때
강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흐르는거야
너도 나처럼 흘러봐
하얗게 피어있는 억새 곁을 지날 때
억새는 이렇게 말했네
너도 나처럼 이렇게 흔들려 봐
인생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연보라색 구절초 곁을 지날 때
구절초꽃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한번 피었다가 지는 꽃이야
너도 나처럼 이렇게 꽃 피어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지날 때
느티나무는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사는 거야
너도 나무처럼 뿌리를 내려 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아래를 지날 때
구름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별 게 아니야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거야
너도 정처없이 떠돌아 봐
내 평생
산 곁을 지나다녔네
산은 말이 없네
한마디 말이 없네
<김용택 님의 詩集에서 ...>
인생은 미완성이다.
우리가 인생은 살아 볼 만하다고 느끼는게 바로 완성된것이 아니라
인생이 미완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것이 결정되었다면 참을리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떻게 사는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수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희망을 갖을수가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 그 면면을 살펴보면 터닝포인트가 항상있습니다
생각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게 되는 어떤 터닝포인터...
터닝포인터에서 크게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만이
성공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요
늘 마음속에 생각은 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으셨다면
이재부터라도 실행에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
August. 21 .2011 深谷 강문학 입니다·´˝"`˚♣♡♨
낙산사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낙산사 주변 전경'/2005년 4월 산불로 소실된 부분을 복원함
'낙산사 일주문'
'홍예문'/ 화강석이 26개사용되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강원도 26개 고을에서 석재 하나씩을 내어 쌓았기 때문임
'원통보전'/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음
'건칠관세음보살좌상'(보물 제 1362호)/2005년 4월 화마로 '원통보전'은
완전 소실되었으나 안전한 곳으로 봉안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사천왕문'/2005년 4월 화마에도 견뎌냄
'빈일루(賓日樓)'
'의상대(義湘臺)'/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坐禪) 수행처라고 함.
'홍련암'/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하기 앞서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기 위해 석굴 안에서 기도하던 바로 그 장소로서 낙산사의 모태 임.
'보타전'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낙산사
양양 낙산사는 2005년 산불피해 이후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건물지와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헌안왕 2년(858)에 범일국사,
조선 초기 세조연간에 중창되는 등 수차례의 중창불사를 거친 역사적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사찰 경내에는 조선전기의 7층 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 해변을 끼고 있는 명승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문사(文士)들에
의해 수많은 고전과 시문(詩文)이 전해지고 있다.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른다는 낙산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은 기도를 하다가 관세음보살을 만나 보살이 가르쳐 준
곳에 법당을 지은 후 낙산사라 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는데,
현재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종각·일주문·천왕문·선실·승방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관세음보살을 보신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의 건물이다.
절 옆에는 의상이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만나 불당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자리에 홍련암이 있고, 의상이 앉아서 참선했다는 자리에 세운 의상대가 있다.
낙산사는 해변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의 사찰이다.
신라< 新羅 > 문무왕< 文武王 > 16년(676) 의상대사< 義湘大師 >가 관음보살
<觀音菩薩 >의 진신< 眞身 >이 이 해변< 海邊 >의 굴< 窟 > 안에 머무신다는
말을 듣고 굴 속에 들어가 예불< 禮佛 >하던 중 관음보살이 수정< 水晶 >으로
만든 염주< 念珠 >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주어 이곳에 사찰< 寺刹 >을
창건< 創建 >하고 낙산사< 洛山寺 >라 하였다 한다.헌안왕< 憲安王 > 2년(858)
범일대사< 梵日大師 >가 중창< 重創 >하였으나 몽고란< 蒙古亂 >으로 소실
<燒失되었다.조선 >< 朝鮮 > 세조< 世祖 > 13년(1467) 왕명< 王命 >으로 크게
중창하였고 예종< 睿宗 > 원년< 元年 >(1469)에도 왕명으로 중건이 있었으며
인조< 仁祖 > 9년(1631)과 21년(1643) 재차< 再次 > 중건이 있었으나
정조<正祖 > 원년< 元年 >(1777)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 다시 중건하였다.
1950년 6·25동란 으로 또다시 소실되어 1953년 재건<再建 >하였다.
사찰 내에는 조선 세조 13년(1467) 크게 중창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칠층석탑< 七層石塔 >(보물 제499호)과 예종 원년(1469)에 주조< 鑄造 >한
동종< 銅鐘 >(보물 제479호)이 있으며, 사찰 입구에 있는 홍예문< 虹예門 >과
원통보전< 圓通寶殿 > 둘레에 있는 담장< 垣墻 >은 강원도< 江原道 >
유형문화재< 有形文化財 >로 지정되었다.
부속건물로는 의상대< 義湘臺 >, 홍련암< 紅蓮庵 >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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